뿌리를 찾아/종친행사

'16 뿌리찾기 중국관광[참고용] 2016-08-07

이창신 2016. 8. 10. 15:26

♣ 일시 : 2016-08-07(일) '16-08-03(수)~07(일) <4박5일> 제5일차

♣ 장소 : [중국] 정주-진성-양성현-낙양-정주-개봉-정주

♣ 인원 : 24 (남20, 여3, 중국1)

♣ 비고 : 2016 양성이씨 시조 뿌리찾기 중국관광

 

■ 명함

<1>

   



    



   



   





    


 

   


 

   

 

 

 

 

   

 

■ 이수광 고증


 


 


 


 


 


 


 


 


 


 


 


 


 


 

[출처] 양성이씨 중국뿌리찾기마당 http://cafe.daum.net/yangsungchina/bInw/42

중국 산시성 진성일보 이길의 기자 취재기

2015925

 

사이트 참조

http://old.jcnews.com.cn/szbk/thrbwbb/html/2015-09/25/content_8459848.htm

http://r.m.baidu.com/uujqmhl

 

- 신문내용 확대 -

 

一封国外来的寻根信引发一次考证最终得出结论

韩国阳城李氏祖籍在阳城

 

 

 

 

 

 

 

 

 

 

 

 

 

 

 

 

李氏祠堂 外景 

阳城境内的析城山下有一个名为银河的小山村

早在千年之前的北宋时期从这座偏僻的小山村走出一员大将受宋仁宗之命前往高丽戡乱后受高丽皇帝之封最终留守封地生息繁衍形成韩国阳城李氏一脉

 

양성 경내에 "은하"라는 마을이있다.이미 천년전의 북송시기에 이 외진한 마을에서 대장군이 탄생되었다. 대장군은 "송인종"으로부터 고려국에 반란을 평정할 명을 받고 고려로 갔다. 그후 고려 황제로 부터 관직과 땅을 받고 그곳에 남아서 번성하며 "한국 양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李秀匡像

 

高丽王朝9181392),简称高丽又称王氏高丽

文宗王徽(1046-1083)是高丽王朝英主贤王其统治下的高丽王朝进入了鼎盛时期文宗十分崇慕宋朝先进的文化在位期间大量吸收宋朝的文人艺人到高丽入仕为官以达到辅佐朝政和学习宋朝先进文化的目的

 

고려왕조9181392),약칭 고려 혹은 왕씨 고려. 문종왕(1046-1083)고려 왕조의 영주 현왕 문종왕이 고려 왕조를 전성시기로 이끌어 갔다문종은 송조 의 선진적인 문화를 숭배하였다.문종왕 통치시기에 송조의 문인예인들을 흡수 하여 고려에서 관직을 하사 하며 북송 선진적인 문화를 도입 하는 목적이었다

 

1 深山里的李氏祠堂

 

银河村属阳城县横河镇距县城82公里全村由15个自然村组成现常住村民30多人银河村北枕析城山南出银河峡西临鳌拜山东依大乐岭由于地处南太行山断带这里自然风光优美神奇传说不绝于耳

 

8月初记者来到太行山深处的银河村后发现村民的房屋均是就地取材用各色石头修砌而成村东边的高处有座院落四周围墙是用石头活砌而成高大的院门楼用青砖修砌门楼顶部虽然显得破败不堪但在周围众多石头房屋的衬托下整座门楼却显得格外引人注目那是李氏祠堂’”同行的银河村支部书记赵锁应说这个姓李的人可了不得是北宋时期的大将后来去了高丽如今他在韩国还有后人

 

赵锁应提到的姓李的名叫李秀匡近千年前他从太行山深处走出后出使高丽成为如今韩国阳城李氏的始祖

 

2 “韩国阳城李氏来信寻根

 

韩国阳城李氏 来信寻根

 

58岁的赵锁应1983年就担任了村委会主任1986年又担任村支部书记在村里任职已有32年了他说“2008在韩国的阳城李氏曾有人写信与阳城联系希望认祖归宗”“确实有这回事”826日上午在阳城县地方志办公室主任王家胜对此予以证实

 

据他回忆20086阳城县政府接到一封来自韩国的信件信件是寄给晋城市市长后由晋城市外事部门转给阳城县政府

 

信件很快转到了王家胜手里这是一封打印的信件尊敬的晋城市市长先生您好我是一位韩国人我的名字叫李在焕我的先祖是阳城李家李秀匡

 

写信者李在焕在信中叙述道祖先李秀匡是一位1047北宋仁宗时期出使韩国的使臣曾经担任宋仁宗护卫近卫军后来受命出使高丽国因功受封高丽特进金吴大将军上柱国留籍当地现在我的祖上希望我可以找到先祖的后人这就是我发这封邮件的原因李在焕在信中说他是阳城李家第27世孙而与其同辈的阳城李家世孙人才辈出既有政治家也有医生教授和科学家最后李在焕在信中说如今我的祖上嘱托我一定要找到先祖的后人我们会亲自去拜访落款日期“2008.6.6”

 

接到李在焕的信件后阳城县政协与县地方志办公室人员组成考察组王家胜就是其中一员根据李在焕叙述的情况着手开始寻找其家乡所在

 

经多次联系李在焕将高丽国阳城盘谷李氏家谱序的复印件邮寄给王家胜众人吃惊不小韩国也有阳城

 

上网查阅韩国地图韩国首都首尔的东南部忠清北道有一个名为阳城郡的地方根据李在焕的说法那里原是其先祖李秀匡生前的封地盘谷则是李氏家族墓地所在地

 

3 先祖李秀匡北宋时出生于阳城县

 

王家胜等人翻遍了相关史料走遍了阳城就是没有找到盘谷这个地名

 

一天作为山西大学客座教授的王家胜想起了唐代韩愈的送李愿归盘谷序一文开头一句太行之阳有盘谷这为他的寻找提供了目标和方向终于在台头乡现合并于蟒河镇盘龙村的金台寺发现一通清代石碑上有南靠盘谷东临析城的记载我们村就有盘谷正翻找时银河村村支书赵锁应有事找到王家胜的办公室

 

闻听此言王家胜当即随赵锁应赶往银河村盘谷之间泉甘而土肥草木丛茂居民鲜少王家胜实地查看发现银河村所处的银河峡其地形地貌与韩愈文中所提的盘谷特征非常吻合银河峡的河床上还发现一块上刻盘古开天石字样的红色巨石

 

据赵锁应说银河村地域富含银矿资源在古代曾开采银矿由于经济较富裕所以为官宦和商贾所掌控或许是出于安全角度考虑当时还办有镖局武馆形成了练兵习武的悠久传统出现过不少武将

 

经多方查证王家胜终于从尘封已久的历史遗迹中查找到了与盘谷有关的一些线索和脉络银河村的银洞坪自然村过去就叫盘谷社也称李盘谷

 

经过深入细致的调查和考证最终尘埃落定李在焕先祖李秀匡北宋时出生于阳城县的盘谷即现在的银河村银洞坪自然村

4 李秀匡出使韩国,后因功受封留籍当地

 

韩国阳城李氏考证结束后2010年夏阳城县政协派包括王家胜在内的调查组人员前往山东烟台与已在当地一家韩资企业任职的李在焕会面

 

得知先祖故乡有了下落且阳城县驾岭乡南峪村还遗存着规模很大的李氏先人的坟茔李在焕很激动当即表示要尽快回阳城拜祭先人

 

时隔不久李在焕到达阳城县南峪村在李氏先人的坟前行叩拜之礼说来也怪刚到坟前时天空非常晴朗可当李在焕先生叩拜时天空却阴了起来还下了雨王家胜回忆说当时李在焕仰天长叹真是感动了天地啊

 

那次回乡祭祖后李在焕又给王家胜来信希望了解家乡的土特产情况王家胜随后写信将阳城土特产情况详细介绍给了远在烟台的李在焕

 

之后李在焕又给王家胜来信表示欲组成有30多人的韩国阳城李氏寻亲团回家乡进行寻根之旅李在焕先生的这一愿望至今还没有成行王家胜说

 

记者通过网上查询得知目前韩国阳城李氏4万人已传29其中主演电视剧大长今被国人所知的韩国艺人李英爱韩国阳城李氏28代孙

 

有关李秀匡的记载在国内史料中无从考证有种说法认为李秀匡出生于北宋真宗景德元年1004),宋仁宗天圣十年1032),李秀匡考中武秀才被皇上召为天子护卫近卫军李秀匡古稀之年留守高丽非常思念故乡将封地起名阳城离世之前撰写了高丽国阳城盘谷李氏家谱》,寓意后裔永远不忘中国故乡

 

虽说韩国阳城李氏故乡考证尘埃落定可王家胜仍有疑惑李秀匡根出自在唐代就居住在峪里村今驾岭乡南峪村的李姓家族最迟在宋初就迁居到古称盘谷的银洞坪可自清咸丰年后150多年银洞坪李姓去向不明这支李氏家族最终去了哪里这个谜团给王家胜留下了不解的疑惑

 

5 “韩国阳城李氏回乡祭祖

 

虽然对盘谷有了定论可是王家胜又对李氏家族从何而来产生疑惑

 

据赵锁应说现在村里常住人口30多人却没有一户姓李的村民即使是早些年也没有李姓存在

 

王家胜在银河村往北的横河镇紫院村的一通古石碑上发现了线索紫院村里李姓村民非常多紫院村村民说银河村的李姓人就是从紫院迁移过去的

 

经进一步考证紫院村是李氏一族的故乡其根出自唐代就居住在峪里村的李姓家族“‘峪里就是如今的阳城县驾岭乡南峪村王家胜说在宋初这支李氏家族就从南峪西迁至析城山南门河下游在晋豫两省交界处不足2公里的横河镇银洞坪即古盘谷也就是现在的银河村扎根

查阅史料可鎰知宋仁宗赵祯是北宋第四位皇帝(1022323——1063430日在位)根据李在焕提供的相关资料可以看出其先祖李秀匡是1047年出使韩国的使臣王家胜说李秀匡曾担任宋仁宗天子护卫近卫军从时间上看也与史料吻合其出使高丽的时间是在宋仁宗登基25年之时后因功受封高丽特进金吴大将军上柱国留籍当地

 

王家胜解释说上柱国自春秋起为军事武装的高级统帅北魏西魏时设柱国大将军”“上柱国大将军隋代有上柱国”“柱国以封功臣唐代以后兵权归中央机构上柱国逐渐成为功勋的荣誉称号

 

李吉毅

 

번역자료

 

중국 산시성 진성일보 이길의 기자 취재기

 

2015925

 

1. 깊은 산속의 이씨사당

 

은하촌 은 "양성현" "황하진"에 속하며양성현과 82KM 떨어져 있다. 마을은 15개의 자연촌으로 형성되었다현재 마을 주민수는 30여명이다. "은하촌" 북쪽은 "시성산"이 있고 남쪽은 "은하협곡"과 서쪽은"오배이 산" 있고 동쪽은 "다웨이 령"이 있으며 "남 태항산의 끝단에 있다. 이곳의 경치가 아주 수려하며 신기한 전설이 많다. 8월초기자가 "태항산" 깊은 곳에서 "은하촌"을 발견하였다. 주민들의 집은 나무와 가지 각색의 돌로 지여져 있다마을 동쪽 높은곳에 집한채 가있었으며 높고 큰 대문 입구는 내화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네개의 기둥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문루는 형편없이 퇴락해 보였지만 수많은 "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것이 바로"이씨 사당"이었다동행하던 은하촌 담당 서기 가 말했다"사당의 주인이 아주 대단한 분이시다.북송 시기의 대장군이다, 그후 그분이 고려에갔다 아직도 한국에 그분의 후손이 있다"라고했다. 조쇄응씨가 말한 "이씨"의 이름은 "이수광"이다 천년전에 그분이 태항산 깊은 곳에서 나와 고려에 갔다, "한국 양성 이씨"의 원조다

 

2. 한국양성이씨 뿌리를 찾아달라는 편지가 왔다

 

58세의 조쇄응씨는 1983년 부터 촌민 위원회 주임을 담당 하였다1986에 촌지부 서기로서현재 임직한지 32년되었다그분 얘기로“2008한국에 있는 양성이씨로부터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양성과 연락하여 조상을 찾고 싶다"라고 왔고, 826일 오후양성현 지방 사무실 주임 왕가승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였다왕가승의 회상20086양성현 정부가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편지는 양성현 시장 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 후 이것을 "진성시"외사 부서에서 양성현 관청에 전달된 것이다이 편지를 바로 왕가승이 받게 되었다이것은 인쇄 형식으로된 편지다존경하는 진성시 시장님안녕 하십니까! 저는 한국사람으로 이름은 이재환 입니다우리 조상은 양성 이가 이수광 입니다라고 편지 작성자 이재환 님은 편지에서 조상 이수광은 1047(북송 인종시기)한국으로 외교로 간 사신 입니다. 송 인종의 근위대 호위 담당한 적도 있습니다. 고려로 건너간 후 공이 많아서 고려특진 금오 대장군으로 칭송되어 고려에 남아 있기로 했습니다우리 조상이 내가 선조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고 이것이 제가 메일 보낸 원인 입니다이재환 님은 편지에서그는 양성이씨 제27세손 이고 같은 세손에 유명인이 많으며 그중 정치가,의사,교수,과학자가 있다고 했다. 이재환님이 편지에서이제 우리 조상이 나한테 반드시 선조를 찾아야 된다고 했습니다우리가 직접 중국에 있는 현재의 후손을 찾아가서 만나겠습니다낙관 날짜“ 2008.6.6”

 

편지를 받은 뒤 양성현 "정협"과 현 지방 사무실 인원이 탐사팀 조직을 만들었다왕가승이 그중 한명 이였다이재환님의 정보에 따라 그의 고향을 찾기 시작하였다많은 연락을 한후 이재환님이 <고려국 양성반구 이씨 족보>를 인쇄하여 왕가승에게 보내주었다, 족보를 본 후 다들 깜짝 놀랐다 :한국에도 양성 이씨 있다고.. 인터넷에 한국 지도를 보면 서울 동남부 충청 북도 가까이에 "양성군이란 곳이 있다. 이재환 님의 말에 따르면 그곳이 옛날 "이수광"이 고려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곳이다 "반구"는 이씨 묘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3. 선조 이수광 북송의 출생지는 양성현

 

왕가승 등 인원들은 관련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며 양성을 전부다 찾아봤는데 "반구"라는 지명을 찾지 못했다어느날, 산서대학 석좌교수인 왕가승이 당나라 떄 "한유"의 시의 이원반구로 돌아간다첫마디인 태항산은 반구에 있다라는 말에 방향을 찾았다끝내 "대두향"에서 현재 황하진"반용촌""금대사" 절에 있는 청대 비석에 남쪽 반구동쪽 임시청이 기록 되어 있었다우리 촌에 반구가 있구나열심이 찾고 있을 때은하촌 촌주임 조쇄응씨가 왕가승 사무실에 찾아왔다

 

소식을 들은 후 조쇄응은 은하촌을 살펴보았다. 은하촌은 반구 이고물이 맑고 땅이 좋고초목이 무성하며 주민도 적다왕가승도 직접 찾아 고찰 후 발견하였다. 은하촌이 있는 은하 협곡그의 모양은 "한유"가 만든 시에서 나온 "반구"와 가장 비슷하다은하 협곡 강바닥에 "반구가 하늘을 여는 돌"이라는 글이 큰 바위에 붉은 글로 적혀져 있었다다방면으로 조사하여왕가승이 오래된 역사 유적중 에서 "반구"란 단서를 찾았다"은하촌"의 은동평 자연촌을 옛날에는 "반구사" 혹은 "이 반고"라고 불렀다고증을 철저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쳐 최종 결과는"이재환님"의 조상 "이수광""반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은하촌)

 

4. 이수광 사신으로 갔다가 공을 세워 고려국적을 취득하다

 

"한국 양성이씨" 고증이 끝난 후2010년 여름양성현 "정협"에서 왕가승 등 연구팀원 들이 산동성 연태시에 가서 현지 한국 기업에 임직중인 이재환 님을 만나게 되었다이때 조상 고향을 알게 되었다양성현 "자링향 남유촌"은 아직 "이씨 선인"의 묘지가 많다. 이재환 님은 아주 감격적이었다 "빨리 양성에 가서 조상께 인사를 올리고 싶다"라고 했다얼마 후 이재환님은 양성 남유촌에 도달하였다조상 묘지 앞에서 절을 하였다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묘지 앞에 까지 왔을 때만 해도 맑았던 날씨가 이재환 님이 절을 하니까 비 내리네그 당시 이재환 님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하다" 진짜 하늘과 땅까지 감동 시켰구나! 절을 끝내고 곧바로 비가 멈추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께 절을 올린 후, 이재환 님이 왕가승 주임에게 고향 특산물 상황을 알아 보았다. 왕가승은 편지로 수출 가능한 특산물을 상세하게 소개시켜 주었다그후 이재환 님이 다시 왕가승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 방문객 30여명을 모집하여 "한국 양성이씨" 종친들과 중국 고향방문을 위해 준비중이다. 그러나 이재환님의 소망은 아직 이루어 지지 못했다라고 왕가승이 말했다

 

기자가 인터넷에 알게 된 소식이다 현재 "한국 양성이씨"는 약 4만명으로 현재 29세손을 넘어 연속 진행중이다.그중 <대장금>으로 화제가 된 이영애도 "한국 양성이씨" 28대 자손이다

 

이수광 관련된 기록을 보면이수광은 "북 송진종 징덕원년"(1004) 북송인종 천성십년1032),이수광은 무관으로 황제의 천자 근위대 호위대장이 되었다, 이수광은 희년에 고향이 그리웠다. 하사 받은 땅을 "양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려국 양성 반구 이씨 족보"를 작성하였다. 그의 뜻은 영원히 중국 고향을 잊지마라비록 "한국 양성이씨"고향 고증은 밝혀 졌지만 왕가승은 의혹스러 웠다. "이수광조상은 당조대 때부터 구리촌”(현재 자링향 남유촌)의 이씨 가족이었다 가장 늦게 송초(송나라 초기)반구은동평으로 이전 하였다. 하지만 청나라 문종이후 150년은 이 이씨가족은 어디에 갔을까? 이것이 왕가승에겐 가장 의혹이 남아 있었다.

 

5. 한국 양성이씨 고향으로 돌아오다

 

비록 반구에 결론 있었지만 왕가승은 이씨가족이 어디서 왔는지 더 의혹 스러웠다. 조쇄응에 의하면현재 마을에 인구는 30여명 있다. 하지만 이씨는 없었다 옛날에도 이씨는 없었다. 왕가승이 은하촌 북쪽에 황하진 자원촌의 비석에서 답안을 찾았다 자원촌에는 이씨 촌민들이 아주 많았다자원촌 촌민이 말했다: ”은하촌의 이씨는 전부 자원촌에서 이전해 간 것이다역사를 보면 북송인종 조진은 북송의 4번째 황제다 (10223231063430일 까지)

 

이재환 님이 제공한 자료에 보면 선조 이수광1047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고 하였다, ”이수광은 북송인종 천자 근위대 호위를 담당하였다. 당시 상황도 사료와 일치하다. 고려에 출사 시간은 송인종 즉위25년 이였다. 그후 공을 받아 고려 특진 금오대 장군 상주국 으로 고려에 남아 있었다

 

왕가승은 말한다: “상주국은 군사 무장의 최고 통치자이다북위서위주국 대장군상주국 대장군등을 설치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조대 때 상주국” ”주국을 공신 들에게 영예 칭호를 하사하였다.

 

진성일보 기자 이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