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천주교 성지,성당

[익산] 여산성지 2008-05-22

이창신 2008. 5. 29. 13:24

♣ 일시 : 2008-05-22(목) 14:30~15:10

♣ 장소 : 여산성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 코스 : 여산 숲정이- 여산 동헌<백지사터>- 여산성당

♣ 인원 : 3명 (이창신, 임경애, 이수영)

♣ 비고 : 

 

 ■ 여산성지 안내

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 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

됐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

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 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2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

(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 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

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 오는 듯

하다.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 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뒷말 치명 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숲정이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그만큼의 순교자

들을 배출한 여산의 대표적인 순교 성지이다.

 

여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호남 고속국도를 이용, 연무대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약 1.5킬로미터

정도만 달리면 전주, 강경, 논산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각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전주 방향으로

좌회전해 연무대 입소 대대를 지나 충남 도경계를 넘으면 오른쪽에 바로 여산 숲정이 성지와 왼편에

고딕식 여산 성당이 보인다.

 

여산 숲정이를 찾으면 우선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돌판과 그 안쪽으로 서 있는 백지사

(白紙死) 기념비가 유독 눈에 띈다. 백지사란 붙잡혀 온 교우들의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여러 번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수많은 교우들이 이 방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 기념비에는 "이곳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기록상으로만 22명이며 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22명 중 17명이 고산 널바위 사람들이었다. 특히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김성첨

일가 6명의 치명은 대아(大雅)리 저수지에 잠겨 버린 '널바위'(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의 대표

적인 애화(哀話)로 남아 있다.

 

김성첨은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치는 6명을 포함한 한

마을 17명의 믿음이 모두 자기가 가르친 것이라고 진술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우리는 이 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

했다고 한다.

 

부사가 교우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선고한 여산 동헌에서 건너다 보이는 숲정이는 지금은 숲이 아닌

논과 밭 가장자리로 변했다. 여산 본당은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숲정이를 중심으로 부근 전답

4천여 평을 80년 초 이미 사들여 성지 개발에 주력해 왔다. 여산의 성지 개발 사업은 크게 성지 순례

성당과 대형 십자가 건립, 예수 성심상을 조성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여러해를 두고 숲정이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여산 순교지에서 천호산을 옆길로 넘어 천호 마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보 성지 순례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천호산 기슭인 이곳은 여산에서 8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 산길이었으나

1987년 전주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순례길이 더욱 가까

워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 성지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 논산 IC → 좌회전,논산,연무대 방향 → 3km 직진, 1번국도에서 전주방향으로

좌회전 → 8km 직진, 여산으로 진입 → 여산 숲정이, 여산동헌

 

■ 성지 약도

  

 

 

▣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

<성지 입구>

 

<성지 전경> 

 

<성지 표지석> 

 

 

 

<성지 정문> 

 ▲ 철문 옆에 조그만 쪽문이 열려있어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여산성지 안내문>

 

 <야외제대>

 

<제대>

 

<십자가상> 

 

 

 

<순교자 기도> 

  

 

 

 

 

  

 

▣ 여산 백지사터 성지

 

<성지 전경> 

 

 

 

 

 

 <성지 표지석>

 

 <성지 표지판>

 

 

 

 

 

 

 

 

  

 <동헌>

 

 

 

▣ 여산 성당

<성당 입구>

 ▲ 여산 숲정이, 백지사터, 여산성당이 반경 200여미터 안에 모두 모여있다.

  

 

 

 

 

 

  

 

 

 

<성당 내부> 

 

 

 

 

 

 

 

<성모상> 

▲ 성모의 밤 행사 준비 

 

<성당가는 길> 

 

 

 

 

 

 

 

■ 기념사진

<숲정이 순교성지> 

 

 

 

 

 

 

 

 

 

<여산성당> 

 

 

 

▷ 후기

    작은 아이 군훈련소 입소식에 참석차 논산에 내려갔다가 입소식을 마치고 인근 성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서 올라왔다.  이날 돌아본 성지는 여산성지→천호성지→나바위성지 

    로서 모두 처음 가는 곳이다.

 

"끝"